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티브 가비 (문단 편집)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teve Garvey Dodgers.jpg|width=100%]]}}} || || '''{{{#fff 영광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fffff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 입단 첫 해였던 1968년에는 루키 리그에서 시작했지만, 그 해 루키 리그를 문자 그대로 '''박살내며'''(62경기 타율 .338 20홈런 59타점 OPS 1.120) 이듬해(1969년)에는 바로 더블 A까지 승격됐고, 여기서도 좋은 모습(83경기 타율 .373 14홈런 85타점 OPS 0.972)을 보이며 시즌 말미에 처음으로 메이저 무대로 콜업된다. 데뷔 시즌 성적은 대타로만 3경기 나와서 3타수 1안타. 이후 1972년까지는 주로 백업 3루수로 출장[* 가끔 2루수 알바도 뛰었다.]하면서 입지를 넓혔으나 불안한 수비를[* 대학 시절 미식축구를 하면서 얻은 부상 때문에 수비 범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1972년에는 85경기에만 나왔는데도 '''28개'''의 실책을 기록하는 막장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보여줬고, 1972년 시즌 후 팀의 주전 1루수였던 [[웨스 파커]][* 이 쪽은 은퇴 후 경기 분석가 일을 하다가 뜬금없이 1974년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1루에 빈 자리가 생기자 3루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그 자리를 채운다. 1루 전향 후 첫 시즌인 1973년, 가비는 비록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366타석) .304의 타율에 8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맞이한 1974년, 가비는 자신의 1루 첫 풀타임 시즌을 최고의 해로 만든다. 타율 .312에 정확히 200안타를 치며 정교함을 과시했고, 21홈런과 111타점을 기록하면서 파워와 클러치 면에서도 빼어난 모습을 보이며 '''내셔널 리그 [[MLB MVP]]에 올랐다.'''[* 다만, WAR만 놓고 보자면 가비의 MVP 수상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당시 가비의 [[WAR]]은 4.4(bWAR)/3.8(fWAR)로 해당 시즌 NL WAR 1위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마이크 슈미트]]의 9.8(bWAR)/9.4(fWAR)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이버메트릭스적 요소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슈미트는 해당 시즌 홈런왕(36홈런)이었던 데다 20-20에 116타점을 달성하는 등 클래식 스탯에서도 가비보다 나은 점이 많았다.][* 사실 1974년 당시에도 꽤나 논란이 되었던 MVP 수상이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루 브록]]이 35살의 나이에도 3할 타율에 194안타, 그리고 '''[[라이브볼 시대]] 이래 당시 기준으로 역대 한 시즌 최다 [[도루]]였던 118도루를 기록'''하며 전인미답의 성적을 올렸기 때문. 이 해 MVP 투표에서 브록은 가비에 37점 뒤진 233점으로 2위를 했다. 브록은 다음 해(1975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루에 대한 과거의 안 좋은 (사리사욕을 위한, 팀에 도움이 안 되는 기록이라는) 선입견이 MVP 투표 결과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내가 가비를 이기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물론 만일 브록이 MVP를 탔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현 시대에 와서 논란이 되었겠지만(시즌 fWAR 3.0, bWAR 3.5) 적어도 도루 기록 경신이라는 스토리 덕에 변호거리는 있다. 하지만 굳이 브록이 아니더라도 그 아래 순위에 있는 [[자니 벤치]], 짐 윈, [[조 모건]], 심지어는 10위권 타자들까지도 가비보다 성적이 좋거나 비슷했다. ][* 그나마 가비를 위한 변호를 하자면, 200안타도 매 해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은 타자들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며, 당시는 타율, 타점, 홈런 등의 직관적인 스탯들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우세했기에 [[WAR]]은 고사하고 [[OPS]], 심지어 [[출루율]]도 고려가 거의 안 되던 시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로드 커류|그럼 나는 왜??]]-- 그런 의미에서 가비의 스탯은 3할-20홈런-100타점이라는 아주 이상적인 중심타자에 가까웠고, [[마이크 슈미트]]는 타율 낮은 공갈포이자 [[루 브록]]은 대단한 기록을 세웠으나 장타력 없는 선수라는 인식이 기자들 사이에서 강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팀 성적이 MVP 투표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커서, 소속팀인 다저스의 지구 우승을 이끄는 데 공헌했다는 이미지도 한 몫 했다. 이런 팀 성적 버프로 MVP를 수상한 대표적인 선수가 201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20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의 주역이었던 [[앤드류 맥커친]]. 그리고 MVP 투표 시 고려해야 할 사항 중에는 선수의 인격과 노력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Mr. Clean(바른 생활의 사나이) 이미지가 있던 가비가 한 발 앞서 있었던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올스타전에 선발 출장해 동점 2루타를 뽑아내는 등 4타수 2안타 1타점의 활약으로 올스타전 MVP에 올랐고, 내친 김에 [[골드 글러브]]까지 수상하며 수비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다저스가 지구 우승을 거두며 올라간 생애 첫 포스트시즌에서도 가비는 NLCS에서 타율 .389에 2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 OPS는 1.199에 달했다.]했고, 이어진 월드 시리즈에서도 타율 .381의 맹타를 휘둘렀지만 당시 상대는 한창 최강팀 포스를 풍기며 직전 2년 간 우승을 거머쥐었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결국 첫 월드 시리즈는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이후로도 그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1970년대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의 패왕으로 군림하던 다저스의 1루를 굳건히 지킨다. 1977년을 제외하면 1974년부터 1980년까지 매 해 3할이 넘는 타율과 200안타[* 2번의 최다 안타(1978, 1980) 포함.]를 기록했고, 매 시즌 평균 20홈런-100타점 내외를 기록하는 등 장타 및 클러치 스탯에서도 중심 타자다운 면모를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7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선발 출장한 것[* 1978년 올스타전에서는 다시 한 번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은 덤이다. 또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4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면서 다저스 황금 내야진(스티브 가비(1루), 데이비 롭스(2루), 빌 러셀(유격), 론 세이(3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가비는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팬과 기자들과도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야구도 잘하고 외모도 출중한데다 팬들과도 소통할 줄 알고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그가 다저스 최고의 인기 선수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실 이렇게 가비가 큰 인기를 끈 데에는 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했다. 1970년대 미국의 젊은층은 오르지 않는 임금에 비해 계속 오르는 세금으로 힘들어했고, 격동의 1960년대를 보낸 반작용으로 그 때 유행했던 히피적 분위기, 즉 [[마약]]과 프리섹스로 대표되는 퇴폐적 이미지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시대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자유로워졌음에도 그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정치 성향도 [[민주당(미국)|민주당]]에서 [[공화당(미국)|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보수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스포츠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레지 잭슨]]과 같은 거침없는 이미지의 선수보다는 [[놀란 라이언]] 등의 점잖고 건전한 이미지의 선수로 슈퍼스타의 칭호가 옮겨가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가비가 적절하게 등장한 것.] 다저스는 이런 가비의 활약에 고무되어 1977년 시즌 시작 전에 6년 197만 1천 달러 짜리 장기계약을 가비에게 안겨주며 대박 계약까지 터뜨린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teve Garvey Dodgers with Fans.jpg|width=100%]]}}} || || '''{{{#fff [[셰이 스타디움|{{{#fff 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메츠|{{{#ffffff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 전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가비. 이렇듯 그는 인기 스타였다.}}}''' || 다만 1970년대에는 우승 복은 없었는데, 1977~1978년 2년 연속으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NLCS에서 무찌르고[* 두 번의 NLCS에서 가비는 타율 .354를 기록했고, 1978년 NLCS에서는 4경기 동안 무려 4홈런에 7타점, '''OPS 1.611'''이라는 미친 활약을 선보이며 시리즈 MVP에 올랐다.]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번번이 [[뉴욕 양키스]]에게 막히며 7년 동안 3번의 준우승의 아픔을 안아야 했다. [[콩라인]]의 시련을 뒤로 하고 맞이한 1981년, 가비는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어수선하게 진행된 점을 고려하더라도 커리어 로우급 성적을 찍으며(타율 .283, 10홈런 64타점) 풀타임 출장 이후 처음으로 OPS 0.8 이하를 기록하는 등 조금씩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에는 출장해 올스타 연속 선정 기록을 8년으로 연장했다.] 하지만 다저스가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덕에 다시 밟은 포스트시즌 무대에서 가비는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NLDS에서 타율 .368에 홈런 2개를 기록하며 팀을 NLCS로 이끌었다. 이어진 [[레 젝스포 드 몽레알|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NLCS에서는 잠시 주춤했지만[* 그래도 4차전에서 8회에 결승타가 되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포스트시즌의 사나이다운 모습은 이어갔다.] 팀은 5차전 9회에 터진 [[릭 먼데이]]의 솔로포 덕에 간신히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가비는 월드 시리즈에서 3년 만에 만난 숙적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타율 4할대의 맹타로 한풀이를 한다. 팀도 이런 가비의 활약에 힘입어 시리즈 2패로 먼저 몰려 있다가 내리 4연승을 거두며 [[1981년 월드 시리즈|1965년 이후 16년 만에 왕좌에 올랐고]], 가비 자신도 4번째 도전만에 첫 우승반지를 얻었다. 여기에 시즌 종료 후에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야구 선수로서 이룰 만한 것들은 거의 다 이루게 된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과 우승이라는 해피엔딩과는 별개로 가비의 성적은 분명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이어진 1982년 시즌에서도 타율 .282에 16홈런, 86타점이라는 예년에 비하면 부진한 성적을 찍으며 반등의 기미를 보이지 못했고 올스타 연속 선정 기록 또한 중단된다. 시즌 종료 후 가비는 FA(자유계약) 선수로 풀렸고, 다저스는 최대 4년 500만 달러의 계약을 제시했지만 더 긴 계약기간(5년)을 원했던 가비와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유년 시절부터 20여 년 간 이어온 가비와 다저스와의 인연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